그리스로 이민을 올 때 많은 물건을 다른 이들에게 주거나 버리고 왔습니다.

가져 올만큼 새것에 값나가는 물건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괜찮은 가구나 책들은 가져오기엔 많이 무거웠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더 이상 들여다 보게 되지 않는 초,중,고 대학교 졸업앨범, 20년 넘게 수기로 쓴 일기들까지 모두 버리고 왔습니다. 마치 가기 싫은 곳에 가야 하는데 돌아갈 배가 있으면 되돌아 오고 싶어질까 그 배를 불태워 버리는 심정으로 말이지요.

이런 사정으로, 지금 그리스 집에는 한국에서부터 오랫동안 쓰던 물건이 많지 않습니다. 

 

처음 이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엄마가 보내신 소포가 도착했는데, 그 상자엔 이런 저런 필요한 물품들 외에도 딸아이 앞으로 보내는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만들기를 좋아하는 딸아이를 위한 만들기 재료들과 오래된 리코더였습니다.

 

 

 

그 리코더가 정말 눈에 익은 물건이라 한참을 이리 저리 돌려보며 바라보고 있는데, 만들기 재료를 보던 딸아이가 화들짝 놀라며 리코더를 반겼습니다.

"엄마! 이거 내가 한국에 살 때 막 불던 건데!"

"그래? 이게 누구 리코더야? 이거 되게 오래된 리코더 같은데…"

"응. 할머니께서 그러셨는데, 막내 이모 리코더래. 이모가 쓰던 건데 막내 이모 미국가면서 방 정리를 할 때 나왔대. 그래서 한국에서도 내가 막 불고 그랬거든."

"막내 이모 리코더? 그래서 눈에 익었구나. 그런데 너...이거 부는 법 알아?"

"아니. 그냥 막 부는 거야!"

오키

 

당시만 해도 어렸던 딸아이가 리코더 음계를 제대로 알 리가 없었고 그냥 혼자 신나서 삑삑 불며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이 리코더가 그리스 저희 집에 온 지도 몇 년이 지났고, 딸아이는 잊을 만 하면 한번씩 불어줘서 이런 물건이 우리 집에 있다는 것을 상기 시켜주었습니다.

 

지난 주 개학을 하던 날 첫날부터 음악시간이 있었고, 새로 부임하신 음악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다음 주까지 리코더(그리스어:플로예라φλογέρα)를 준비해 오라고 말씀 하셨는데요.

다른 아이들은 문구점에서 음악 실기를 위한 보급형 새 리코더를 구입해서 들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 아이들이 많이 사용하는 보급형 리코더입니다.

(물론 그리스에도 더 비싸고 특화된 리코더들이 있습니다.)

 

 

딸아인 우리 집엔 좋은 리코더가 있는데 왜 사냐며, 그 20년 된 리코더를 찾아 잘 씻어 말리더니 학교에 가져가겠다며 부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저희 집에 있는 거의 20년 한국 A 악기에서 만든 리코더입니다.

사용할 때마다 깨끗이 씻는데도 여기 저기 세월의 흔적은 감출 수 없습니다. 

 

 

저는 딸아이에게 리코더 소리 내는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손가락을 잘 보라고 한 뒤, 쉬운 한국 동요들과 거의 두 세 음만 반복하면 되는 그리스 민요를 부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 리코더는 세월이 무색하게, 좋은 소리를 내 주었습니다.

 

다음 순서로 지켜보던 매니저 씨의 시범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분명 그리스 곡이긴 하나 소리가 좀 이상했고, 리코더를 앞으로가 아닌 옆으로 들고 불었습니다.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리코더 부는 법을 잊은 매니저 씨, 부는 채만하고 휘파람을 불었던 거로군요!

 

겨울이라 춥다고 수염을 기를 때까지 길러, 겨울 잠 자러 가야 할 것 같은

(한국) 피리 부는 (그리스) 사나이

ㅋㅋㅋ

 

 

 

다음 날, 딸아이는 음악선생님과 복도에서 마주쳤고 이 20년 된 리코더를 냉큼 보여드렸는데, 선생님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리코더, 좋은 건데? 어디서 났니? 응? 한국에서 샀다고?

그렇구나. 좋은 것을 구입했네?"

 

일이 바빠서 할말만 하시고 휘릭 가버리신 선생님.

그 덕에 딸아이는 다음 음악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좋다고 말해 준 이 리코더가, 실은 20년 전에 이모가 쓰던 리코더이고, 한국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다고요.

 

  

 

"엄마! 리코더가 스무 살이니까 나보다 오빠야?

그럼 이렇게 말해야겠어요!

흠흠...리코더 오빠! 나 음악 잘 배울 수 있게 부탁해요!"

 

라고 말해 큰 웃음을 준 마리아나입니다.^^

ㅎㅎㅎ

 

새것 사달라고 조르지 않고, 오래된 것이지만 한국에서 만든 의미 있는 물건이라고 좋아해주는 딸아이가 고맙기만 합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좋은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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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여러분은 제가 신고하지 않게 아름다운 댓글만 쓰실 거죠?

 

 

Posted by 꿋꿋한올리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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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연두빛나무 2014.01.14 13: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미있는 리코더인데요.
    아이가 추억이 있는 물건을 벌써 소중히 여길줄 아는것이 참 예쁩니다.
    요즘 새것만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말이죠.
    메니져씨 피리부는 모습이 제가 크게 웃었더니 제 앞에서 공기놀이하고 있는 아이들이 뻥해서 쳐다보네요..ㅎㅎ^^

  3. Favicon of http://meeoow.tistory.com BlogIcon 괭인 2014.01.14 14: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래된 물건보다는 새 물건을 좋아하는 게 보통인데 따님께서 기특하시네요.^^
    아무래도 한국에서, 그것도 막내이모님께서 쓰시던 리코더여서 그런걸까요?
    세월의 의미를 값지게 여기는 모습이 너무 예뻐요~

  4. Favicon of http://mrsnowwhite.tistory.com BlogIcon 아스타로트 2014.01.14 15: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코더 오빠라니ㅎㅎㅎ 정말 귀여워요!
    게다가 오래된 물건이라고 싫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해주는 모습이 참 기특하네요~
    매니저님의 엉뚱한 연주법(?)과 사진의 표정에도 웃고 갑니다ㅋㅋㅋ

  5. Favicon of http://www.fruitfulife.net BlogIcon 열매맺는나무 2014.01.14 15: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리아나가 빈티지랄까 골동품을 아는 거지요! ㅎㅎㅎ
    리코더가 남성형 명사인가 보군요. 오래전 불어 배울 때 보면 만년필도 남성이더라는. ^^;

  6. 2014.01.14 16: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7. Favicon of http://blog.daum.net/sarah_an BlogIcon sarah 2014.01.14 18: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코더가 스무살이니까 나보다 오빠냐는 말,,, 넘 넘 귀여워요~
    어쩜 따님이 이렇게 귀여울까요!!
    오래된 리코더이지만 그리스에서 가족들의 기쁨이 된다니 참 보기 좋습니다.

  8. Favicon of http://author-sooyoung.tistory.com BlogIcon author-sooyoung 2014.01.14 1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리코더 저희 집에 지금 있어요~~^^
    오래된 물건의 독특함을 바라보는 마리아나양의 꾸밈없는 행동과 솔직함이 굉장히 예뻐요~^0^
    댓글은 이제야 쓰지만 깜찍한 마리아나양 덕분에 미소와 함께 하루를 시작했답니다.
    마리아나양~~ 고마워요~*^^*




  9. Favicon of http://factoryw.tistory.com BlogIcon 팩토리w 2014.01.14 20: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 리코더가 오빠가 되었네요!
    리코더 정말 오랫만에 보니, 초딩때 리코더 실기 시험 보던때가 생각나는군요~
    전 정말 음악시간이 너무 재미없었던 아이거든요~~ ㅎㅎㅎ
    음악시간을 손꼽아 기달리는 따님, 아~ 기특해요! ㅋㅋㅋ

  10. 조이스 2014.01.14 20: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리코더는 오래전에 어디론가 사라졌네요. 따님 말하는게 참 귀여워요~

  11. mariacallas1 2014.01.14 2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마리아나는 사랑스러워요^^

    의리도 있구말야^^

    리코더오빠 소리에도 배시시 미소가 번졌고

    매니저님 리코더 부는 흉내 사진에서는 빵터졌네요 ㅎㅎㅎ

    올리브나무님 오늘도 행복하게 글 잘 읽고 갑니다 ^^

  12. 케이 2014.01.14 2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몇 년만에 보는 리코더인지....피리라고 했는데...
    부는 척하는 매니저님 너무 귀여우신데요.

  13. 인영이 2014.01.15 00: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리아나가 참 기특하고 예뻐요 ^^ 사진보니 날이 갈 수록 더 예뻐지네요!! :)

  14. 여인네 2014.01.15 0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래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 넘넘 이쁘네요^^
    따님이 너무 귀여워요~

  15. nue 2014.01.15 06: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리아나 너무 귀여워요!! 마지막사진 특히넘 사랑스럽네요♥

  16. 김영미 2014.01.15 08: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 어머님이 리코더를 보내셔서 추억도 간직하시고
    마리아나양의 오빠도 되어 좋아요 ^^
    소리가 좋다는건 잘만들어진 리코더인가봐요
    여기선 주로 일제 야마하 보급형을 사용하거든요 ㅠㅠ
    리코더를 잘배워서 고학년에 올라가면 멋진 연주도 하는 마리아나양을 보고 싶네요
    동수씨는 언제나 재미있으셔요 ㅎㅎㅎㅎ

  17. 새벽.. 2014.01.15 08: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 사진들은 하나 같이 정말 좋아요. 정감 어린 리코더...캐스터네츠, 탬버린, 트라이앵글 같은 타악기 말고 학교에서 배우게 된 첫 관악기? ㅋㅋ 그러고 보니 실로폰과 멜로디언도 기억이 나고...^^
    동수씨의 장난기는 우울하기 쉬운 우기에도 여전하시군요. ㅎㅎ 마리아나는 여전히 귀엽구요. 볼은 그대로인데 키만 자란 것 같은 느낌인데요?^^

  18. Favicon of http://hititler.tistory.com BlogIcon 히티틀러 2014.01.15 18: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왠지 저랑 비슷하네요.
    저는 어린 시절에 할머니 댁에 가서 창고를 뒤적거리다가 아버지께서 어릴 적에 쓰셨던 주판을 발견했어요.
    주머니에 바느질로 이름까지 새겨놓은 거요ㅎㅎㅎ
    집에 챙겨가지고 와서 보관했다가 초등학교 6학년인가? 학교에서 주판을 배우는 시간에 가지고 가서 썼어요.
    당시 다른 친구들은 학교 앞 문구점에서 산 총천연색 알록달록한 주판을 쓸 때 왠지 저 혼자 뿌듯해하던 기억이 있어요.
    그 이후 이래저래 이사하고 집 정리하고 하다보니 어디갔는지 모르겠는데, 참 아쉬워요ㅠㅠ

  19. Favicon of http://thelittleprince.tistory.com BlogIcon <어린 왕자> 2014.01.15 2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모의 리코더를 소중히 생각하는 마리아나!
    역시 마리아나는 너무나 사랑스런 아이입니다. 댓글을 안 쓸 수 없네요. ^^
    참 착하고 귀엽고 예쁜 아이라는 저의 칭찬을 전해주세요~! ^^

  20. 들꽃처럼 2014.01.16 1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리스에서도 아이들이 리코더를 배우는군요
    저도 얼마전에 큰 딸 리코더를 사줬는데
    제가 연주 해봐도 제 기억 속의 소리가 안나더라구요 ^^

    20년된 이모의 리코더를 소중하게 여기는 예쁜 마리아나네요~~~
    울 딸들이랑 일부러라도 어울리게 하고 싶은( ^^;; ) 마리아나 언니예요~~~~

  21. kiki09 2014.02.07 12: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ㅎㅎ
    마리아나의 고운 마음씨에
    훈훈해지는군요..
    리코더라...
    시간을 다시 으허헉 거의 30년전으로 되돌리려니
    뇌에 무리가 오는군요 ㅎㅎㅎㅎ
    그래서 중딩때로 거슬러 가보니
    으억 음악시간에 단소'를 배웠는데요
    음계 틀렸다고 단소채로 머리를 맞았던
    정말 억울하면서도 열받던 기억이 ㅠ.ㅠ
    마녀'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던 음악쌤~이 기억나는군요
    으어어억... 어찌나 우리들을 두들겨 패셨던지 ;;;;

    마리아나의 리코더와
    제 단소가 갖고 있는 추억이 어쩜 이리도 딴판일까요
    꺼억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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